숨은 뒷면건축의 뒷면No.0502026년 10월 3일 공개

한양도성 성벽에 돌 모양이 네 가지인 건, 고쳐 쌓을 때마다 그 시대의 방식으로 돌을 다듬었기 때문

서울 한양도성 성벽에는 생김새가 다른 성돌이 섞여 있고, 서울시는 이를 네 시기로 나눕니다. 1396년 처음 성은 길이로 3분의 2가 흙이었는데, 25년 뒤 무너진 곳 대부분이 흙 성이라 1422년 32만여 명이 40일도 안 돼 성 전체를 돌로 쌓았고, 그 뒤 숙종 · 순조 때도 무너진 구간을 새 크기의 돌로 고쳐 쌓았습니다. 영상의 문장마다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과 서울시 · 국가유산청 원문 가운데 어디서 확인했는지 붙여 두었고, 보도로만 확인한 문장은 없습니다.

✔기관 원문과 대조 △원문을 못 봐 언론 보도로 확인 ○우리 해석·연결 문장 기호를 누르면 근거가 펼쳐지고, 문장을 누르면 그 자리부터 재생됩니다.

근거 모음

대본에 쓴 근거와, 확인했지만 대본에서 뺀 주장까지 모두 적었습니다.

어떻게 확인했나

확인일 2026년 10월 3일.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태조실록 · 세종실록 · 숙종실록 기사의 국역과 한문 원문), 서울특별시 서울 한양도성 누리집, 국가유산청 월간 국가유산사랑,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문화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원문과 대조했습니다. 실록의 날짜는 음력이고, 척은 실록에 적힌 그대로 두었습니다. 보도(△)로만 확인한 문장은 없습니다. 「그럼 무너진 흙만 다시 단단히 다지면 되지 않냐고요?」(문장 14)는 질문 꼴이지만 1421년 실제 논의에 나온 의견이라 실록 기사를 붙였습니다.
  • 「3분의 2」(문장 5)는 태조실록의 흙 성 4만 3백 척을 돌 성 1만 9천 2백 척 · 물길 양쪽 돌 성 1,050척과 합친 6만 550척으로 나눈 값(약 66.6%)입니다. 물길 양쪽에도 돌 성이 있어 「높고 험한 곳만 돌로」(문장 4)는 줄인 말입니다.
  • 「대부분 흙 성」 「여섯 배를 넘었다」(문장 9 · 10)는 1421년 보고의 무너진 흙 성 2만 5,535척과 돌 성 3,946척으로 계산한 값(약 86.6% · 6.47배)입니다. 「25년 뒤」는 1396년과 1421년의 차이입니다.
  • 1421년 계획은 무너진 길이 기준이었는데 1422년 마친 날 기록은 「성을 모두 돌로 쌓았다」입니다. 계획이 언제 성 전체로 넓어졌는지 이어 주는 기사는 찾지 못했습니다.
  • 실제로 뽑은 인원은 실록 합계가 32만 2,400명, 도별 합이 32만 2,460명으로 달라 「32만 2천 명」으로 말했습니다. 공사 일수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가 38일로 적지만, 영상은 실록의 시작일과 마친 날로 「40일도 안 돼」라고만 말했습니다.
  • 숙종 때 돌 모양은 서울시가 「방형」, 국가유산청이 「장방형」으로 적어 「네모」라고 말했습니다. 숙종이 돌 크기를 맞춘 이유는 기관 원문에서 찾지 못해 말하지 않았습니다.
  • 순조 때 공사의 연도와 실록 기록은 확인하지 못해 「순조 때」라고만 말했습니다.
  • 인왕산 바깥 길에서 네 시대 돌이 한 벽에 섞인다는 것은 서울시 순성 안내 문구(「그 이후에 쌓은 성돌」 포함)로 확인했고, 한 줄 안에 네 가지가 나란히 있다는 원문은 없습니다.
  • 남거나 다시 세운 길이는 서울시 누리집 안에서도 13.7킬로미터(2023년 기준)와 12.854킬로미터로 다르고, 전체 길이도 18.6 · 18.627 · 18.127킬로미터로 갈려 2023년 기준 값을 썼습니다.
  • 사람 이름과 번지는 적지 않습니다.

정정 기록

아직 정정한 것이 없습니다.

틀린 곳은 영상 댓글로 남겨 주세요. 확인해서 사실이 틀렸으면 고정 댓글과 이곳에 날짜와 함께 남깁니다(정정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