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뒷면건축의 뒷면No.0492026년 10월 2일 공개

남한산성 성벽 밖으로 성이 하나 더 삐져나온 건, 병자호란 때 적이 차지하고 대포를 쏜 봉우리를 1686년 성 안에 들였기 때문

남한산성 본성 동쪽 성벽 밖에는 혹처럼 삐져나온 바깥 성, 봉암성이 있습니다. 병자호란 때 적이 성 복판을 굽어보는 동쪽 봉우리를 차지하고 대포를 연달아 쏘아 성 위 담이 모두 무너졌고, 전쟁 뒤 손본 성은 이듬해 청 사신의 요구로 새 포루를 헐기로 해야 했습니다. 1686년 조선은 그 봉우리에 성을 쌓아 성 안에 들이기로 했습니다. 영상의 문장마다 조선왕조실록과 기관 원문 가운데 어느 것으로 확인했는지 붙여 두었습니다.

✔기관 원문과 대조 △원문을 못 봐 언론 보도로 확인 ○우리 해석·연결 문장 기호를 누르면 근거가 펼쳐지고, 문장을 누르면 그 자리부터 재생됩니다.

근거 모음

대본에 쓴 근거와, 확인했지만 대본에서 뺀 주장까지 모두 적었습니다.

어떻게 확인했나

확인일 2026년 10월 2일.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기사 7건(인조실록 1638 · 1639년, 숙종실록보궐정오 1686년, 영조실록 1729년, 정조실록 1779년)의 국역과 원문, 한국학중앙연구원이 편찬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남한산성」, 경기문화재단 지지씨 「남한산성 - 성곽, 성곽시설물」, 국가유산청 국가유산 오픈API(사적 남한산성)와 대조했습니다. 1686년 기사의 골짜기 문장과 1729년 기사의 「한봉에 앉아서 보면」 문장은 2026년 10월 6일 실록 원문을 다시 열어 확인했습니다. 집권 세력의 군사 기반이라는 해석(문장 27)은 2010년 학술 논문 초록으로 확인했습니다. 보도로만 확인한 문장(△)은 없습니다. 「성엔 돌 하나 더 얹기 어려워졌다」(문장 13)는 1639년 철거 요구와 1686년 기사의 「으름장에 접혔다」를 이은 우리 설명이라 「해석」으로, 봉암성이 봉우리를 감싸고 본성에 다시 붙은 모양(문장 21)은 성의 모습을 말한 것이라 「관찰」로 표시했습니다.
  • 병자호란 때 대포를 쏜 봉우리는 1686년 실록 기사가 동쪽 벌바위, 1779년 정조실록 속 전언과 경기문화재단 해설이 남쪽 한봉으로 적어 갈립니다. 영상은 1686년 기사대로 「본성 동쪽 봉우리」로 말했습니다.
  • 1686년은 성을 쌓자는 건의를 숙종이 허락한 해(3월 13일)입니다. 완공한 날을 적은 실록 기사는 찾지 못했고, 경기문화재단 해설은 50여 일 공사로 적습니다.
  • 한봉까지 성벽을 이은 해는 정조실록 국역 주와 경기문화재단 해설이 1693년으로 적지만, 영조실록 1729년 기사의 진술은 1689년에 공사를 이었으나 「잇대어 쌓지는 못했」고 1694년 뒤 멈췄다고 적습니다. 영상의 「7년 뒤 … 한 줄로 더 이었습니다」는 1693년 쪽 기록을 따른 말입니다.
  • 1705년에 헐었다는 해와 「수어사 때」는 정조실록(1779), 「쓸데없다」는 이유는 영조실록(1729)에서 확인해 두 기사를 한 문장으로 이었습니다. 경기문화재단 해설의 「1705년 청나라 사람이 헐었다」는 실록과 달라 쓰지 않았습니다.
  • 1729년 「한봉에 앉으면 성 안이 보인다」는 말과 1739년 다시 쌓은 일 사이를 직접 이은 기사는 찾지 못해 영상은 순서만 이었습니다.
  • 1639년 새 포루를 실제로 헐었는지 적은 기사는 찾지 못해 「헐기로 합니다」로 말했습니다. 전쟁 뒤 포루가 겨냥한 봉우리는 경기문화재단 해설만 한봉으로 적어, 영상은 봉우리 이름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 봉암성이 봉우리를 감싸고 다시 본성에 붙은 모양은 지금 성벽에서 보이는 모습으로, 이 모양을 적은 원문 문장은 따로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 성벽 전체 12킬로미터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부속 시설을 포함한 성벽의 전체 규모 12.356㎞」입니다. 보(步) 단위 옛 기록 숫자는 미터로 바꾼 원문이 없어 쓰지 않았습니다.
  • 사람 이름과 번지는 적지 않습니다.

정정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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