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거 모음
대본에 쓴 근거와, 확인했지만 대본에서 뺀 주장까지 모두 적었습니다.
어떻게 확인했나
확인일 2026년 10월 4일.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인조 · 영조 · 정조 · 고종 때 기사)의 국역과 한문 원문, 국가유산청 국가유산 정보(장경사 · 망월사지 · 개원사지)와 월간 국가유산사랑, 한국학중앙연구원이 편찬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경기문화재단 경기역사문화유산원의 원문과 대조했습니다. 보도로만 확인한 문장은 없습니다. 1779년 실록 기사 두 건(문장 3 · 6 · 8)은 축성 155년 뒤 임금과 신하가 그때를 돌아본 말입니다. 350여 명 · 270년 · 1907년 파괴처럼 실록에서 찾지 못한 내용은 국가유산청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해설로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산 위 공사판엔 일꾼이 늘 모자랐죠」(문장 5)는 1625년 비변사가 「역군이 많지 않아서 걱정」이라 한 대목을, 「그 절들은 … 병영이었습니다」(문장 28)는 승군이 절에 나뉘어 살며 승려이자 군인으로 지냈다는 원문을 우리 말로 옮긴 것입니다.- 성 안 절 수는 원문마다 다릅니다. 처음 아홉 곳(국가유산청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1781년 실록 「아홉 사찰」), 새로 지은 일곱 곳, 나중 열 곳(1864년 실록 · 백과의 영원사 추가 · 경기역사문화유산원의 「여덟 절과 개원사」)으로 갈려, 영상은 처음을 아홉, 나중을 열로 말했습니다.
- 성 안 승군 수는 국가유산청이 350여 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남한치영」이 상주 138명에 해마다 교대로 오는 356명, 같은 사전 「남한산성 장경사」가 270명으로 적어 갈립니다. 영상은 국가유산청 값을 썼습니다.
- 승려 대신 돈으로 바꾼 해는 실록 기사가 1755년 8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 1756년입니다. 한 명당 금액은 1754년 건의 16냥, 백과 「치영」 10냥, 1781년 경상도 관찰사 상소 22냥으로 시점마다 달라, 영상의 「22냥까지 올라」는 1781년 상소의 값입니다. 언제 어떻게 올랐는지는 원문이 적지 않습니다.
- 한 명에 거의 100금 · 한 절에 해마다 수백 금(원문 4~5백 금)은 1754년 호남(전라도) 사정을 아뢴 상소의 값이고, 22냥과 절 하나 없는 고을은 1781년 경상도 사정을 아뢴 상소의 말입니다.
- 1894년 갑오개혁 때 승군 제도가 없어졌다는 건 국가유산청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해설로 확인했고, 이를 적은 실록 · 관보 원문은 찾지 못했습니다. 270년은 1624년부터 1894년까지이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남한산성 장경사」는 「고종 때까지 250년」으로 적습니다.
- 절마다 맡은 성벽 구간은 망월사(동장대 구간) 한 곳만 원문에 적혀 있습니다.
- 팔도도총섭 임명 해는 실록(1779년 회고)과 국가유산청이 1624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남한산성 국청사」가 1625년으로 적어, 영상은 임명 해를 따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승려 이름은 직함으로 말했습니다.
- 「관군만으로는 모자라 승군을 불렀다」와 성을 쌓은 승군 수는 원문을 찾지 못해 말하지 않았습니다. 장경사 창건 해도 1624년과 1638년으로 갈려 말하지 않았습니다.
- 사람 이름과 번지는 적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