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뒷면건축의 뒷면No.0742026년 10월 7일 공개

세종대왕릉이 여주에 있는 건, 1469년 서울 헌릉 서쪽 무덤을 옮겨 왔기 때문

10월 9일 한글날의 주인공 세종대왕이 잠든 여주 영릉은 세종이 처음 묻힌 자리가 아닙니다. 1446년 서울 헌릉 서쪽에 지은 첫 무덤을 1469년 여주로 옮기면서, 옮기기 어려운 돌 사람과 비석은 그 자리에 흙을 덮어 묻었고 그 돌들은 1973~1974년에야 다시 파냈습니다. 영상의 문장마다 어떤 기관 원문으로 확인했는지 붙여 두었습니다.

✔기관 원문과 대조 △원문을 못 봐 언론 보도로 확인 ○우리 해석·연결 문장 기호를 누르면 근거가 펼쳐지고, 문장을 누르면 그 자리부터 재생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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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거 모음

대본에 쓴 근거와, 확인했지만 대본에서 뺀 주장까지 모두 적었습니다.

어떻게 확인했나

확인일 2026년 10월 6일. 국가유산청의 국가유산 디지털 서비스와 국가유산 검색 오픈API(「여주 영릉과 영릉」 · 「구영릉 석물」 · 「서울 정릉」), 국가유산청 세종대왕유적관리소 누리집,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세종 · 문종 · 세조 · 예종실록 국역), 한국학중앙연구원이 편찬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원문과 대조했습니다. 모든 문장이 기관 원문으로 확인돼 보도로만 확인한 문장(△)은 없습니다.
  • 돌을 옮기지 않은 이유는 기관 원문이 「운반상의 어려움」 · 「옮기기 어려웠기 때문에」까지만 적고, 실록의 묻으라는 명령 기사는 이유를 적지 않아 영상도 거기까지만 말합니다.
  • 무덤을 옮긴 이유는 「자리가 좋지 않다(풍수)」는 논의까지만 기관 원문에 있고, 왕실의 불행 같은 구체 사정은 기고 칼럼에만 있어 쓰지 않았습니다.
  • 옛 무덤 돌의 개수는 같은 기관 안에서 12기 · 13기로 갈려 숫자를 쓰지 않았습니다.
  • 발굴 연도는 국가유산청 「1973∼1974년」을 따랐고, 발굴 장소를 「내곡동」이라고 적은 기관 문장은 없어 옛 무덤 자리와 발굴을 따로 말했습니다.
  • 국가유산포털 상세 해설은 화면에서 바로 읽을 수 없어 같은 기관의 디지털 서비스 · 오픈API 원문으로 대신 읽었습니다.
  • 현대 인물의 이름과 번지는 적지 않습니다.

정정 기록

아직 정정한 것이 없습니다.

틀린 곳은 영상 댓글로인스타그램 · 틱톡 댓글로 남겨 주세요. 확인해서 사실이 틀렸으면 이곳과 정정 기록에 날짜와 함께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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